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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와 서울의 일제강점기 시절의 언어와 삶 비교

by 주PD 2025.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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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더램프 / 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2019)는 엄유나 감독이 연출하고 유해진과 윤계상이 주연한 영화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명한 작품이다. 단순히 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말이라는 존재를 통해 민족성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시대적 저항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특히 《말모이》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당대의 억압적 환경을 배경으로 민중의 삶과 투쟁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본 글에서는 ‘을지로’, ‘경성’, ‘조선어학회’라는 세 공간적 키워드를 중심으로 《말모이》가 일제강점기 서울의 사회적 풍경과 공간성,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언어 투쟁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분석해본다.

1. 을지로: 민중의 삶이 숨 쉬던 거리

《말모이》 속에서 주인공 김판수(유해진 분)는 을지로 일대의 극장에서 일하며, 다양한 민중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을지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당시 서울 도심의 하층민들이 밀집해 살았던 장소로서 ‘생활의 공간’이었다. 실제로 을지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중심의 경성 중심부와는 다르게, 조선인 상공업자나 서민,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공간이었다. 극장, 국숫집, 수공업 작업장이 밀집해 있었고, 한국적인 정서와 말이 유지되던 구역이었다.

《말모이》는 을지로를 통해 언어와 삶이 연결된 공간을 보여준다. 김판수가 일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모두 한글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공간이며, 이는 언어의 말살 정책이 조선인들의 일상에 침투하지 못한 마지막 보루임을 의미한다. 영화는 을지로의 좁은 골목과 복잡한 건물 구조를 통해 당시 민중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트와 미술적 고증은 관객에게 당시 서민의 삶이 어땠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또한 을지로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점차 조선어학회 활동에 가담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민중 속에서 살아가는 한 남성이, 언어라는 개념에 눈을 뜨고, 그 언어를 지키는 일이 ‘민족을 지키는 일’임을 자각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을지로는 단순히 도시의 한 구역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정서와 주제를 지탱하는 생활적, 민족적 상징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 경성: 식민 지배의 중심이자 이질적 근대의 풍경

영화는 조선총독부가 위치했던 중심부 경성을 매우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경성은 일제의 식민 행정이 집약된 장소로, 조선어 말살 정책의 중심이 되는 권력의 공간이다. 영화 속 판수는 이 공간을 오가며 조선어학회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체포와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긴다. 경성은 억압과 통제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한국인들의 움직임은 모두 감시 대상이 된다.

실제 일제강점기의 경성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총독부 건물을 중심으로 행정기관, 일본 상점가, 관사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조선인은 이 공간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거나 차별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화는 이 같은 공간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섬세하게 보여준다. 웅장하게 재현된 조선총독부 건물, 깔끔하게 정렬된 일본식 상점 거리, 이를 배경으로 도망치는 조선인들의 모습은 당대의 계급적·민족적 차별을 공간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경성은 조선어학회 활동이 가장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말모이 원고를 운반하거나, 어학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늘 경성을 통과해야 하며, 이는 목숨을 건 이동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이 공간에서 발각될까 긴장하며 행동하고, 이는 관객에게 식민 지배 아래 ‘말’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위협을 받았는지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경성은 단순한 도시 중심부가 아니라, 언어 억압의 상징이며, 민족 정체성이 말살당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3. 조선어학회: 공간이자 저항의 상징

《말모이》의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는 바로 조선어학회다. 실존했던 이 단체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대부분의 인물이 체포되고 고문당하며, 말모이 원고는 압수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공간을 단순한 학술 기관이 아니라, ‘말을 지키는 사람들’의 은신처이자 저항의 중심지로 그려낸다. 판수는 이 공간에 처음 들어설 때 ‘무지한 민중’이지만, 점차 사전을 만드는 일이 단순한 언어 작업이 아닌 민족 운동임을 깨닫는다.

조선어학회 내부는 고즈넉한 목재 서가, 다닥다닥 붙은 원고, 밤샘 작업에 지친 학자들의 모습 등으로 묘사된다. 이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작은 독립운동 본부이자, 지식인과 민중이 함께 꿈꾸는 ‘말의 나라’의 시작점이다. 영화는 조선어학회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으로, 그리고 소박하게 그려내며, 화려한 혁명보다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저항을 강조한다.

실제 조선어학회는 서울 사직동 일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주변은 일본 관청과 조선총독부 감시망 속에 놓여 있는 매우 위험한 위치였다. 영화는 이 공간을 통해 언어 보존이라는 활동이 얼마나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는지를 강조한다. 특히 최현(윤계상 분)과 같은 지식인은 물론, 김판수와 같은 민중이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이 공간이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라, 계층과 계급, 지식과 노동을 넘어선 민족 연대의 장소로 기능한다.

또한, 말모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을 모은다’는 뜻처럼, 이 공간은 흩어진 말과 사람, 기억과 정체성을 모으는 장소다. 이는 영화의 정체성과도 일치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언어라는 것이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한 민족의 뿌리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4. 결론: 공간으로 기억하는 말의 역사

《말모이》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의미 있는 메시지 전달 도구로 활용한 영화다. 을지로의 민중성과 생활성, 경성의 권력성과 억압성, 조선어학회의 상징성과 연대성은 각각 한국어를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세 공간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민중이 살아가는 곳에서 언어는 피어난다. 그것이 억압당하는 중심지에서 위협받고, 그러나 끝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지켜지고 기록된다.

이 영화는 단지 한 권의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것이 아니다. 그 사전을 둘러싼 사람들, 공간, 시대를 모두 통합해 ‘말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 지나치는 거리, 무심코 지나치는 건물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역사가 담겨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영화가 바로 《말모이》다. 공간으로 기억하고, 말로 이어가는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 있어 소중한 기록이자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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