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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지의 공간성 영화 <추격자> 서울 시내의 위험한 공간을 분석하다

by 주PD 2025.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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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영화사비단길 / 배급사: 쇼박스

《추격자》(2008)는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한국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영화는 연쇄 살인범과 전직 형사의 대결 구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실화를 기반으로 한 리얼리즘, 무력한 공권력에 대한 비판, 숨 쉴 틈 없는 전개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요소는 ‘공간’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서울 도심 속 실제 골목과 주택가를 배경으로 촬영되었고, 이를 통해 ‘안전해야 할 일상의 공간’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본 글에서는 《추격자》의 촬영지로 사용된 서울의 도심 공간이 어떻게 ‘폐쇄감’과 ‘불안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1. 도심: 일상과 범죄가 공존하는 공간

《추격자》는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 등 실제 서울 도심의 골목과 주택가를 중심으로 촬영되었다.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들이 세트나 외딴 공간을 활용해 비일상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달리, 《추격자》는 서울 시내의 실제 장소들을 이용해 관객의 몰입도를 극대화했다. 이로 인해 영화는 마치 뉴스에서 본 실제 사건처럼 현실감 있게 다가오며, “저런 일이 내 동네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다”는 공포를 심어준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에서 전직 형사 엄중호(김윤석 분)가 피해 여성의 행방을 쫓아 골목과 주택가를 뛰어다니는 장면은 서울이라는 도심의 낯익은 공간들이 얼마나 위협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주택,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들 속에서 카메라는 빠르게 움직이며 시선을 유도하고, 관객은 극 중 인물과 함께 쫓고 쫓기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서울 도심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밀도 높은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에서 ‘도망갈 수 없는 미로’처럼 기능하며, 범인의 이동을 추적하는 데 혼란을 준다. 일상 속 익숙한 공간이 범죄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은 관객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며, 영화의 리얼리즘을 더욱 강화한다.

2. 폐쇄감: 탈출구 없는 골목의 심리적 압박

《추격자》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좁은 골목’이다. 이 골목들은 시각적으로도 제한된 시야를 제공하고, 물리적으로도 움직임을 제약하는 공간이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범인 지영민(하정우 분)이 잡히기 직전, 어둡고 좁은 골목에서 벌어지는 추격 장면은 폐쇄적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이 폐쇄감은 단순히 공간적 요소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의 심리 상태와도 연결된다.

엄중호는 끊임없이 피해자의 행방을 쫓지만, 모든 단서와 경로는 막혀버린다. 마치 골목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매는 형국이다. 피해자 미진(서영희 분) 역시 지하실, 욕실, 창문 없는 방 등에 갇히며 극심한 공간적 억압을 경험한다. 영화는 이러한 장면을 통해 공간적 폐쇄감을 심리적 고립감으로 확장시킨다. 이는 관객에게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연출이다.

감독은 이를 위해 카메라의 움직임도 신중히 설계했다. 좁은 공간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로 흔들리는 시점을 제공하거나, 장시간 롱테이크를 통해 답답한 느낌을 유도한다. 또한 인물들이 문을 여는 장면이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반복적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계속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인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 공간 구성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스릴러 장르의 정서를 구체화시키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3. 불안감: 안전해야 할 공간의 역전

《추격자》가 주는 가장 큰 불안은 ‘일상 공간의 전복’에서 비롯된다. 영화 속 범죄는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택가, 길거리, 공중화장실 등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장소에서 일어난다. 이처럼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관객에게 공포 이상의 ‘불안’을 남긴다. 왜냐하면 그 공간은 바로 자신의 삶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에서 중요한 장소인 ‘범인의 집’은 외관상 평범한 가정집이다. 영화는 이 집 안에 있는 욕실, 방, 복도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장면을 통해 평범한 공간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경찰서조차 무기력하게 묘사된다. 보호받아야 할 공간에서조차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현실은, 단순한 범죄 영화의 구조를 넘어 제도적 무력감까지 비판하게 만든다.

감독은 이러한 불안감을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배경음악을 최소화하고 환경음을 극대화한다. 골목의 빗소리, 창문 넘어 들리는 TV 소리, 발소리 등 일상적인 소리를 강조함으로써, 관객은 더욱 현실적인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이 이야기가 바로 지금 내 옆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현실감과 불안감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다.

또한 영화의 결말에서도 이런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가해자는 끝까지 명확한 동기 없이 행동하고, 피해자는 구조되지 못한다. 이는 보통의 장르 영화가 해소하는 방식과는 다르며, 오히려 현실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안전함이 보장되지 않는 공간, 예측할 수 없는 인간, 구조되지 않는 피해자라는 요소들이 결합되며 영화는 마지막까지 관객의 불안과 긴장을 놓아주지 않는다.

4. 결론: 현실 공간이 만든 공포, 그리고 스릴러의 진화

《추격자》는 한국 영화 속 스릴러 장르의 수준을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그 중심에는 ‘공간’의 정교한 활용이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극도의 불안과 폐쇄감을 유발하는 심리적 장치로 활용함으로써 영화는 현실의 공포를 극대화했다. 익숙한 도심 공간이 얼마나 낯설고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이 영화는, 안전하다고 믿는 공간마저 무너뜨리는 ‘도시의 진짜 공포’를 이야기한다.

스릴러 영화의 공간은 더 이상 어두운 숲속이나 폐공장이 아니다. 《추격자》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골목, 집, 거리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통해, 스릴러의 무대를 일상으로 끌어왔다. 그 결과, 이 영화는 단순한 자극이 아닌, 구조적 공포와 현실 비판을 담아낸 한국형 스릴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추격자》는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공간에 어떤 감정과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공간을 통한 영화적 메시지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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